2009년 9월 8일 화요일

미련한 가수들 - 임진모

가수에‘대중성’이란 말

상상력 마비시키는 毒

음악 향한 묵묵한 발걸음

그 미련함에 아름다움 존재




가수가 음악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못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우리 시대의 독설가 신해철이 얼마 전 다시금 메가톤급 펀치를 날렸다. “가수활동 20년 동안 남은 것은 빚 20억밖에 없다!” 신해철과 같은 큰 가수가 20년간 노래 불러서 20억은 못 모았을망정, 되레 20억 부채를 졌다는 고백은 조금 서글프다.


하지만 그가 최근 음악계의 모진 불황에 대한 분노로 이 말을 토해낸 것은 아니다. 그 다음 발언이 중요하다. “그래도 그 세월 동안 함께해준 팬들이 남아 있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는 지난 7월 18일 데뷔 2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콘서트를 ‘주인공’인 팬들의 성원 속에 성공적으로 마쳤다. 신해철이 스무 해를 보내면서 재정적 풍요를 획득하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이날만큼은 뜨거운 감격을 맛보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순간 때문에 가수는 무대에 서고 노래를 부른다.


이게 아니라면 오랜 시간 연주와 가창력, 곡 쓰기를 연마해도 당장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음악 분야에 몸담을 이유가 없다. 특히 요즘같이 아무리 땀을 흘려 음악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고, 설령 들어준다 해도 돌아오는 게 거의 없는 맥 빠진 분위기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솔직히 미련한 짓이다. 그러나 미련하기 때문에 가수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앨범이 대중적 호응을 얻어 많이 팔리고, 그래서 돈을 만지고 스타가 되는 것만이 가수의 길은 아니다. 음악을 하는 게 좋고, 또 음악을 좋아하는 바로 그 이유로 더러는 미련한 짓도 한다. 최근 미니앨범으로 돌아온 ‘댄싱 퀸’ 엄정화를 보자. 1990년대 후반과 새천년 초반에 그가 쏟아낸 히트곡은 부지기수다. ‘초대’ ‘페스티벌’ ‘포이즌’ ‘몰라’ 등등. 이 시기에 그는 뭘 내놓아도 뜰 것 같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였다.


2004년의 앨범 ‘셀프컨트롤’에 와서 엄정화의 가공할 기세는 뚝 멈추었다. 다음 2006년의 앨범도 실패했다. 그가 이 두 장의 앨범이 대중적으로 잘되리라고 기대한 것 같지는 않다. 소비자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게다가 흥겨운 댄스로 일관하던 엄정화표 음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감상용 일렉트로니카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식상한 패턴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쉬 대중과 접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미련하게 실험을 가했다고 할까. 대중성만을 따졌다면 이런 앨범을 연속으로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때 음악가들은 대중성이라는 말에 치를 떤다.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이란 변화를 바라는 가수들의 상상력을 옥죄고 만다. 인기를 유지하려면 늘 하던 대로 음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가수라면 그러한 대중성에의 무기력한 봉사가 너무 싫다. 남들이 미련하다고 말리더라도 새로운 시도에 나서야 한다. 엄정화는 그 두 장의 앨범으로 인기대열에서 후퇴했는지 몰라도 요즘 아이돌 가수들에게는 턱도 없는 ‘무게감’을 얻는 소중한 성과를 거두었다.


미련하기로 말하면 긴 20년 활동이나 실험적 자세를 떠나서 앨범을 내는 행위도 빠지지 않는다. 너도나도 디지털 싱글을 내야 존재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열 곡 이상 담긴 앨범을 낸다는 것은 무모해 보인다. 누가 사고 들어줄 것인가. 그런데도 힙합을 하는 남성듀오 ‘배치기’는 얼마 전 세 번째 앨범을 내놓고 이런 말을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3집 가수라서 정말 행복하고 뿌듯하다.”


결과를 떠나서 음악에만 집중했고 그리하여 앨범을 발표한 자체가 영광이라는 것이다. ‘투자 대비 산출’이나 ‘유통기한’을 면밀히 따지는 마케팅적, 산업적 사고가 횡행하는 시대지만 음악가의 기본은 묵묵히 뚜벅뚜벅 음악을 향해 매진하는 데 있다. 바로 이 미련함에 음악예술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알게 모르게 미련함의 바다에 자진해서 빠지는 가수가 많기에 음악은 아직도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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