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김동인 그리고 현실도피 <발가락이 닮았다>


“여보게, 자네 이런 기모찌(기분) 알겠나?”
“어떤?”
그는 잠시 쉬어서 말을 시작했습니다.
“월급쟁이가 월급을 받았네. 받은 즉시로 나와서 먹고 쓰고 사고, 실컷 마음대로 돈을 썼네.
막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세. 지갑 속에 돈이 몇 푼 안 남아 있을 것은 분명해.
그렇지만 지갑을 못 열어 봐.
열어 보기 전에는 혹은 아직은 꽤 많이 남아 있겠거니 하는 요행심도 붙일 수 있겠지만 급기야 열어 보면 몇 푼 안 남은 게 사실로 나타나지 않겠나?
그게 무서워서 아직 있거니, 스스로 속이네 그려.
쌀도 사야지. 나무도 사야지. 열어 보면 그걸 살 돈이 없는 게 사실로 나타날 테란 말이지.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지갑에서 손을 멀리하고 제 집으로 돌아오네. 그 기모찌 알겠나?”




김동인 - <발가락이 닮았다> 中
소설의 화자는 M의 친구이자 의사로, M이 매독을 심하게 앓은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M에 대해서는 다소 풍자적인 경향을 보인다. 그는 젊어서 무절제한 성생활을 일삼다가 매독을 심하게 앓아 생식기능을 잃은 채로 결혼을 하였다. 처음엔 아내와의 금슬이 좋지만 불임에 대한 자격지심인지 이내 아내를 상습적으로 때리게 된다. 그러면서 화자와의 술자리에서 방탕했던 젊은 시절을 후회하는 발언을 자주 한다.

그러다 아내가 아이를 낳게 되고, 남편이 불임인지도 모르고 자랑스럽게 나 임신했네 하는 아내에게 M은 아무런 태클도 못 걸고 입을 다문다. 그리곤 자기 자식일리 없는 아이를 안고 와서 "나랑 발가락이 닮았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분명 독자로 하여금 쓴웃음을 머금게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서술자 "나"가 그렇듯이 우리는 결코 그에게 "전혀 닮지 않았다"고 직언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에게서 바보같을 지언정 어떻게든 사랑을 실현하려는 인간다운 노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동묘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그토록 정감이 가지 않는 국내 작가들 속에서 김동인을 선택한 건 어떤 촉이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그의 사상과 배경등을 다 배제하고 작품만을 놓고 봤을때
당시 어둡고 습한 시절이었던지라 가장 흡입력있게 본 건 <약한 자의 슬픔>이었지만
<감자><배따라기><광염소나타>등의 유명한 작품을 제치고
그래도 여운이 많이 남는 건 약16페이지 분량의 <발가락이 닮았다>였다.



얼마전 구서울역사에서 <근대성의 새발견-모단 떼끄놀로지는 작동중> 이란 주제를 통해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근대문학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각한 작품이 구서울역사 옥상에 전시되어있었다.미술뿐만 아니라 정통한 도슨트님 덕분에 아주 심도있는 해설과 설명을 들으며 관람한지라 문득 근대문학->김동인에 대한 단상을 가지게 되었다. 


여가,여행,오락이라는 개념이 생겨난것이 일제강점기 즉 근대라고 알려지는데
과연 '현실도피'라는 개념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스스로가 더욱 더 잘 알고있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결코 전부 드러낼 수는 없고 언젠간 밝혀질 것이 뻔한 사실이지만
마음 앓고 있는 것들에 대한 기억들..
고작 발가락이 닮았다는 걸 찾아낸 주인공 M이 찌질하고 불쌍해보일지 몰라도
그 누가 그에게 혹은 지금의 나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망친다는건 분명히 저마다 도망치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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